6·25에 생각나는 미국의 책임과 역할

전문가 칼럼

6·25에 생각나는 미국의 책임과 역할

미국은 우리에게 무오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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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 미국이다. 미국은 일제 40년의 종식 시킨 해방을 가져다준 나라이며 6·25 동란 때 우리를 자신들의 피로서 지켜준 고마운 우방이다. 

역대 다른 대통령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고 여겨지는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이 아니었다면 자신 같은 사람은 아오지 탄광 같은 데서 고생을 해야 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결코 우연이거나 과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국은 절대 선이고 무오류일까. 그렇지 않다. 

미국과 우리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 3년 동안 미 군정이 실시되면서였다. 그때 미 군정은 아무리 좋게 평가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시행착오와 오류투성이였다고 역사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 가운데 1947년 3월부터 제주도에서 일어난 이른바 제주 43사태는 미 군정 흑 역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끝난 뒤, 주민들은 가두시위에 돌입했는데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한 어린이가 치이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이 그냥 가려고 하자 군중들이 야유를 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문제의 기마 경관은 경찰서 쪽으로 쫓기듯 말을 몰았고, 그때 총성이 울렸다. 경찰서를 공격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발포한 것이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사망했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 당국은 발포가 불가피했다며 정당방위였다는 주장을 폈고, 나중에는 아예 이를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했다. 

당시 제주 주민들 사이에서는 미 군정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일자리는 부족했고 극심한 흉년에 따른 식량난이 이어졌다.

그런 제주도에서 유난히 좌익운동이 활발했던 것이 우연이 아니다. 경찰은 1일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지 주민들은 3월 10일 제주 직장의 95%가 참여한 민, 관 총파업으로 맞섰다. 도청 직원, 현직 경찰관까지 동참했을 정도로 파업은 전면적이었다. 파업에는 우익 진영도 가담했다. 

미 군정은 전면 탄압으로 대응했다. 미 군정은 당시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라고적고 있었다. 서울에서 급파된 한국인 경무부장은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며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대규모 검거에 나섰다. 경찰의 탄압으로 궁지에 몰린 남로당은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며 무장투쟁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 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350명의 무장대가 총과 칼, 죽창 등을 들었다. 거대한 비극의 씨앗이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경찰서와 우익단체 등을 습격했다. 이후 6년 6개월 동안 이어진 비극적 유혈사태의 시발점이었다.

미 군정은 광주에 주둔하던 제20연대를 제주에 파견했다. 초기에는 미군 대령이 군, 경의 진압작전을 총지휘했다. 지휘관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천명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무고한 민간인이 총살되는 일이 빈번했다. 토벌대는 그해 6월 중순까지 6000여 명을 체포했다.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숨어들었다. 

그해 8월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11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은 가장 참혹한 상황이 벌어진 시기였다.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토벌 연대장에 새로 취임한 한국군 박모 대령은 취임 일성으로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라고 했다.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했다. 그러나 노인과 어린이 등 마을을 떠나지 않은 주민도 많았다. 이들은 무차별 학살의 대상이 됐다. 해안으로 내려온 주민들 중에서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사라져 있으면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에 발생한 희생자는 1만 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350명의 토벌에 50배의 양민이 희생된 것이다. 심문도, 재판도 없었다. 

1949년 3월 설립된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는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고 했다. 산에 숨어 있던 많은 주민들이 내려왔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죄명도 모른 채 군법회의에 회부돼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이송됐다. 훗날 6·25가 발발하면서 이들은 끝내 즉결 처형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 숫자가 2500여 명에 달한다. 그 끔찍한 보도연맹 사건이다.

1954년 4월 최후의 무장 대원이 생포된 것을 끝으로, 4·3사건은 공식 마무리됐다. 그러나 유족들은 그 후 연좌제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감시를 당했고, 공무원 임용이나 사관학교 입시 등 각종 시험은 물론, 출입국 등에서도 제약을 받았다. 4·3사건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유족들을 옭아매는 반공법,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4·3사건을 소재로 소설 ‘순이삼촌’을 쓴 소설가 현기영은 정보기관에 연행돼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4·3사건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비로소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1987년 제주대 총학생회가 첫 위령제를 치렀고, 1989년에는 시민사회단체 주관으로 첫 공개 추모제가 열렸다. 

4·3특별 법이 국회를 통과한 건 10여 년이 더 흐른 1999년 12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2018년 대통령의 공식 사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는 국내의 일이었다.

며칠 전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에서 ‘제주 4·3 인권 심포지엄’이 열려 4·3에 대한 미국의 역할과 책임 문제가 미국의 심장부에서 중점 거론됐다. 격세지감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며 미 국무부 동북아 실장을 지낸 존 메릴 박사 등 미국인 학자들이 나서 미국의 실질적 책임은 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오늘이 6월 25일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그 전쟁을 끝내는 책임의 상당 부분을 전쟁의 한 당사자였던 미국이 자녀야 한다는 논리는 결코 비약이 아니다.

우리 동포들이야말로 지역의 정치인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4.3의 비극과 함께 자신들 미국 청년이 5만 가까이 희생된 6·25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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