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칼럼] 아버지날

전문가 칼럼

[이성수칼럼] 아버지날

한국은 어머니날, 아버지날이 따로 없고 합해서 5월 8일이 어버이날이다. 실은 한국전쟁 이후 어머니들이 자녀 양육은 물론 생업에도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를 위로하고 어머니의 은혜(恩惠)를 다시금 깨닫게 하기 위해 1957년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정(指定)했다. 어머니날은 그 후 17회까지 지켜왔다.


그러다가 부모(父母)는 다 같은데 왜 어머니날만 있고 아버지날은 없느냐는 여론이 일어나자 낳으시고 길러주신 어버이의 은혜(恩惠)에 감사하고, 어르신을 공경하는 마음을 기리기 위하여 1973년부터 5월 8일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변경 공포하여 지금까지 실시하고 있다.

미국에 이민 와 보니 미국은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이 따로 있다. 즉 어머니날은 5월 둘째 주일(금년은 5/10)이고, 아버지날은 6월 셋째 주일(올해는 6/14)이다.


미국의 어머니날은 1914년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매년 5월 두 번째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선포하면서 정식 기념일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날은 훨씬 늦은 1972년에야 국가휴일로 채택되었다. 그 순서도 아버지날이 먼저가 아니고 어머니날이 먼저이다. 부모(父母 아버지 어머니)라 할 때 아버지가 먼저 아니던가?


어머니날 가족이 모여 어머니 은혜(恩惠)에 감사하고, 축하도 해 드리고, 식사도 대접하고 싶어 한국 음식점을 찾아갔다. 가는 곳마다 만원사례였다. 미국 식당을 가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아버지날은 어머니날과 대조적으로 식당이 텅텅 비어 있었다.


오래전 일이다. 어머니날 교회에 갔더니 손녀뻘 되는 학생들이 도열하고 어머니들에게만 해피 마더스 데이(happy mother’s day)라 인사하고 가슴에 빨강 카네이션꽃을 달아주었다. 어느 익살맞은 아버지가 왜 아버지에겐 꽃을 달아주지 않느냐고 하니 한 학생이 “아버지날에 달아 드릴게요.” 하였다.


한참 후에 아버지날이 돌아와 교회에 갔다. 역시 손녀뻘 되는 학생들이 해피 파더스 데이(happy father’s day)라고 인사하고 꽃을 달아 줄 줄 알았는데 아무도 꽃을 달아주지 않았다. 꽃을 달아주는 책임을 맡은 학생이 깜빡했다며 사과한 후 부랴부랴 뒤늦게 꽃을 구해 가지고 와서 앉아 있는 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며 꽃을 달아주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이래저래 아버지날이 소외당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서운했다.


어머니날이 돌아오면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새록새록 나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 하면 어렸을 때 하던 참외서리가 생각난다. ‘서리’란 재미로 남의 집 참외나 수박, 콩 등을 몰래 훔쳐 먹는 것을 말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릴 때였지만 스릴도 있고 낭만도 있었다. 참외서리 하기에 좋은 날은 그믐밤이었다. 달빛이 없으니 주인한테 들키지 않아 좋았다. 참외밭에 들어가 손으로 참외를 더듬으며 냄새를 맡아 익은 것만 골라 땄다. 막 따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앞에서 플래시 빛이 환하게 비쳤다.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꼼짝없이 붙들려 원두막 밑으로 끌려와 꾸중을 크게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데리러 오셨다.


어머니는 참외밭 주인아저씨에게 용서를 구하셨다.

그 시절 어른들은 서리를 하다가 들켜도 한 번쯤은 너그럽게 봐주었다. 왜냐하면 그 어른들이 어렸을 때에 서리를 하다 들켜도 어른들의 어른이 예쁘게 봐주었기 때문이다.

주인아저씨는 우리들에게 참외 두 개씩을 나누어 주며 “얘들아! 다시는 서리하지 말아라. 


이 참외 갖고 집에 가 동생들하고 나누어 먹어라.” 하셨다. 주인아저씨가 너무 고마웠다.

나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집으로 왔다. 오는 동안 내내 어머니는 나에게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그 시절 서리는 아이들이 하는 오락 중 하나였다.


다음날 학교를 파하고 집에 와 보니 소쿠리에 참외가 가득히 놓여 있었고 참외 냄새가 집 안에 진동하였다. 어머니는 “어젯밤 참외 서리한 네 친구들 모두 데리고 오너라.” 하셨다.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대청마루에서 참외 잔치가 벌어졌다. 나는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참외였지만 목이 메어 먹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서리를 한 아들의 기(氣)가 죽을까 봐 보리 양식을 헐어 참외와 바꾸어 오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느라 가난해진 집안에서 어렵게 사시며, 맏아들인 나를 훌륭히 양육하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

한 개라도 더 팔아 생활비로 보태야 할 달걀을 나만 틈틈이 먹여 영양을 보충시켜 주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42살의 젊은 나이로 내가 17살 때 아들이 성장하여 잘 사는 것을 보지 못하고 병에 걸렸거나 사고도 아닌 비명(非命)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6·25전쟁 때 공산당이 패주(敗走)할 무렵 지방 빨갱이들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체포하러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피난 가서 안 계시자 집을 보고 계시던 어머니를 대신 연행하여 지서(파출소) 뒤 야산에서 여러 양민들과 함께 학살을 당해 세상을 떠나가신 불쌍한 어머니!


백일도 안 된 막내를 비롯하여 5남매를 남겨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해마다 어머니날이 돌아온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효도 한 번 해드리지 못한 것이 한없이 후회가 된다. 그럴 때면 어머니의 얼굴이 아련히 떠올라 자꾸만 눈물이 난다.

아! 불쌍한 그리운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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