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김 컬럼] 정복자 해방자 그리고 영웅

전문가 칼럼

[엘리엇 김 컬럼] 정복자 해방자 그리고 영웅

… “Of the nations of the world, Korea alone, up to now, is the sole one which has risked its all against communism. The magnificence of the courage and fortitude of the Korean people defies description. They have chosen to risk death rather than slavery. Their last words to me were: "Don't scuttle the Pacific!” 


I have just left your fighting sons in Korea. They have done their best there, and I can report to you without reservation that they are splendid in every way. It was my constant effort to preserve them and end this savage conflict honorably and with the least loss of time and a minimum scarf ice of life. Its growing bloodshed has caused me the deepest anguish and anxiety. Those gallant men will remain often in my thoughts and in my prayers always. 


I am closing my 52 years of military service. When I joined the Army, even before the turn of the century, it was the fulfillment of all of my boyish hopes and dreams. The world has turned over many times since I took the oath at West Point, and the hopes and dreams have all since vanished, but I still remember the refrain of one of the most popular barracks ballads of that day which proclaimed most proudly that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And like the old soldier of that ballad, I now close my military career and just fade away, an old soldier who tried to do his duty as God gave him the light to see that duty. Good Bye.

….”지금까지 전세계 모든나라 중에서 국력을 다하여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유일한 나라는 한국뿐 입니다. 한국 국민의 용기와 확고부동한 신념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노예가 되느니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그들이 나에게 전한 최후의 말은 “태평양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였습니다. 나는 전투중인 여러분의 아들들을 한국의 전쟁터에 남겨둔 채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있으며 모든 면에서 훌륭하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과장함이 없이 여러분들께 보고 드립니다. 


나는 그들을 잃지 않고 이 야만적이고도 비참한 전쟁을 명예롭게 최대한 빠른 시일안에 그리고 최소한의 생명의 희생으로 완결 지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여 왔습니다. 한국전쟁은 지금 피흘림을 더욱 증가시키고 있으며 이에 나는 깊은 슬픔과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싸우고 있는 용사들은 언제나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나는 그들을 위하여 늘 기도할 것입니다.


나는 52년에 걸친 군생활을 이제 마치려 합니다. 내가 육군에 입대한 것은 아직 20세기가 시작되기도 전이었지만 당시 나는 소년시절의 모든 꿈과 희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내가 웨스트포인트의 광장에서 선서한 이후, 세계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나의 희망과 꿈도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시 불러보던 군가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렴의 자랑스러운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노병처럼 나도 이제 군생활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주신 빛을 따라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해온 한사람의 노병으로서 사라져 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 유명한 연설은 1951년 4월19일, 미합중국 육군원수 더글라스 맥아더장군의 미연방 상하양원 의회 고별연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연설 중간중간에 장군은 수차례나 의원들의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았으며 그 이튿날인 4월20일, 뉴욕 맨하탄 브로드웨이에서 있은 장군의 뉴욕 퍼레이드에는 약 7백만명으로 추산되는 환영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고 행진가도에 빌딩에서 뿌려진 종이 조각과 색종이가 3,000톤 가까이 수거될 정도로 엄청난 환영행사 였다. 


6일후 4월26일, 장군의 시카고 퍼레이드에는 약 3백만명으로 추산되는 환영인파가 몰렸고 장군은 솔저 필드(Soldier Field) 스타디움에서 5만명의 시민들이 입장한 가운데 연설을 하였다. 전세계 역사상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살아있는 영웅을 보기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행사는 전무후무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미국의 영웅을 넘어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1950년 6월25일, 전력과 국가경제면에서 남한보다 월등한 우위에 있던 북한은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하였다. 나흘후 6월 29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은 전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수원비행장으로 입국해 육군본부의 전황 브리핑을 보고받고 영등포구·신길동 일대 (현재 영등포공원)의 한강 남쪽방어선을 시찰하였다. 


장군은 이곳 진지에서 만난 국군 병사에게 "이곳을 얼마 동안 지킬 수 있는가?"라고 물었으며, 병사가 "상관이 철수 명령을 내릴 때까지 지키겠습니다"라고 답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이 시찰이 미군의 본격적인 6·25 전쟁 참전 결정과 국군의 사기 고양에 큰 계기가 되었고,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장군은 회고록에서 전하고 있다. 


이는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해 보급선을 끊음으로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것이었다. 1950년 9월15일, 미 극동군 최고사령관겸 UN군 총사령관이된 장군은 성공율 5천분의1 이라고 할정도의 불가능에 가까운 기습적인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총 50여 차례의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시킨 ‘상륙전의 귀재’라 불리던 장군이 아니었으면 엄두도 내지못할 작전이었다. 


이후 전세는 역전되어 북진을 계속하였으나 중공군 수십만이 침략을 위해 압록강 인근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보고를 받고 만주폭격을 워싱턴 DC에 건의 하게된다. 하지만 2차대전으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미국국민들의 전쟁피로감, 광기에 가까운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침략야욕으로 인한 확전과 3차대전의 가능성등을 우려한 트루만 대통령은 그를 직위해제 하고 도쿄로 부터 본국송환 시킨다. 세계적인 영웅이었던 그도 선거직의 대통령이 보낸 전보문 한통으로 임명직의 비애를 이렇게 철저히 맛보았던 것이다.


6년전 일본 도쿄. 

1945년 8월 30일, 맥아더의 전용기 ‘Bataan호’가 아쓰기 공항에 착륙했다. 그는 그의 상징(symbol)인 옥수수대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채 비행기에서 내려왔고, 호신용 무기인 권총조차 전혀 소지하지 않았으며 수행 인원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수만명의 무장한 옛 일본군 병사들이 불안하고 착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맥아더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이 태연함 자체가 하나의 무언의 권력선언 이었고, 이후 6년에 걸친 그의 ‘일본 상왕’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3일후 9월2일, 그는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전함 미조리함  함상에서 휘하 연합군 장성들과 장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대표인 시게미즈 마모루 외무대신과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참모총장 으로 부터 정식 항복문서(Instrument of Surrender)에 서명을 받는다. 


한국은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대국민 포고문 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과 종전을 선언한 8월15일을 국경일인 해방된날, 광복절로 기념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은 바로 이날 9월2일을 공식적인 대일승전 기념일 (V-J Day, Victory over Japan)로 정하고 있다. 


미국의 5성장군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에 도착한 이후 그의 생활은 ‘정복자’ 그 자체였다. 그는 수년간 ‘일본 제일의 여신’이라 불리던 톱스타 여배우를 곁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일본의 ‘상왕(太上皇)’으로 군림했다. 그 후 6년 동안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었고,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일본을 떠날 때 수백만 명의 일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그를 배웅했다는 사실이다.


1951년 4월 16일, 도쿄의 거리에는 인파가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수백만 명의 일본인들이 그렇게 자발적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미국 대사관에서 하네다 공항까지 이어진 도로를 완전히 메워버렸다. 그들은 시위를 하는 것도, 항의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한 명의 미국인이 일본을 떠나는 길을 아쉬워 하며 눈물로써 배웅하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는 울음과 외침이 끊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감사합니다, 장군님”, “맥아더 장군님, 부디 떠나지 마세요”라는 팻말을 높이 들고 울부짖고 있었다.


정복자이자 해방자라는 상반된 얼굴을 동시에 지닌 이 복잡한 인물,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미국의 5성장군이었던 그는 왜 패전국이자 전범국가의 국민들로 하여금 이토록 진실하면서도 이별의 슬픔에 북바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을까? 그 모든 이야기는 그가 처음 일본 땅을 밟았던 순간부터 시작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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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자 해방자 그리고 영웅 (2부)

엘리엇 김     (칼럼니스트)

도쿄에 도착한 맥아더의 최우선 과제는 단순한 군사 점령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정신적으로 완전히 재구성하려 했다. 그가 겨눈 대상은 일본인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신성한 존재, 바로 히로히토 천황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프로이센 체제를 본따서 천황의 절대 권위를 확립한 뒤, 천황은 ‘현인신(現人神)’, 즉 인간의 모습을 한 신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 신을 직접 신단에서 끌어내릴 작정이었다. 1945년 9월 27일, 그는 천황의 황거를 찾아가지 않았다. 대신 히로히토를 ‘호출’했다.


미국 대사관 관저에서 역사적인 장면이 사진으로 남았다. 키 180cm가 넘는 맥아더는 노타이에 맨위의 단추가 열린 군복셔츠 차림으로 두손을 허리에 얹어 재면서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반면 왜소한 체격의 히로히토는 깍뜻한 예의를 갖추고 몸에도 잘 맞지않는 연미복 예복을 입은 채 정중하고도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옆에 서 있었다. 


이 사진은 다음날 일본 전역 신문의 1면톱을 장식했고, 일본 국민에게 준 심리적 충격은 원자폭탄에 비견될 정도였다. ‘정복자’ 앞에선 ‘신’도 결국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정신적 상징이 무너졌다면, 정치적 권위 역시 짓밟혀야 했다. 


당시 일본 총리대신 이었던 요시다 시게루가 맥아더를 예방하러 왔을 때, 미군 경비헌병은 그에게 후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통보했다. 이는 패전국 이지만 주권 국가의 내각수반 에게는 극도의 굴욕이었다.

요시다가 분노를 담아 항의하자, 맥아더는 창밖 도쿄만을 유유히 항해하는 미 제7함대의 거대한 전함들을 가리키며 점잖고도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상황에 맞게 표현을 다시 정리해 보시죠.” 이말은 바로, “다시한번 말해봐!”의 극히 세련되고도 정제된, 격조를 갖춘 외교적 언어표현 이었다. 개인의 수준과도 마찬가지로, 외교적인 언어표현은 바로 그나라의 국격과 수준을 상징하는 것. 요시다는 즉시 주눅이 들어 침묵했다. 그는 구시대의 모든 규칙이 이미 무효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전범들을 처단하기 위한 극동국제군사법원은 연합국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미육군 원수의 특별포고령과 동 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로 공포된 극동 국제군사법원 헌장에 따라 1946년 1월19일에 설치되었고, 5월에 개정되었다. 도쿄법정은 1948년에 판결을 내렸는데, 7명이 사형(교수형), 16명이 종신형, 2명이 유기금고형을 선고받았으며, 2명은 판결전 사망, 1명은 매독에 의한 정신이상으로 불기소처분 되었다. 


재판이 개정된 법정은 이들 전범들이 자기들의 후배이자 제자들인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훈시하고 교육하던 도쿄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건물 2층 대강당 이었다. 

사형 집행 방식은 전원 교수형이었다. 독일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는 달리, 맥아더는현역 군인이라 할지라도 군인들의 명예형인 군복차림의 총살형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것 처럼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아주 지옥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미국 측에서 현직 군인들 3명에 대한 총살형을 강력하게 반대해서 전원 교수형을 선고한 것이었다. 또한 교수형 집행시에도 군복이 아닌 일반 흉악범죄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죄수복을 입혀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독일 뉘른베르크의 국제 군사재판 경우에는 카이텔과 요들이 군인 신분이라 군복 착용을 허용받고 (다만 훈장및 계급장은 강제탈거 되었다.) 교수형을 집행했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의 나머지는 원하는 복장(주로 정장)을 입게 하고 형을 집행했다. 


대신 독일에서는 목줄의 길이를 고의로 더 짧게 조절한 요제프 랑 방식 (기둥에 그냥 목을 매다는 교수형)으로 최소 10분 이상 질식하며 고통스럽게 처형한 반면, 일본에서는 전범들이 원하는 군복은 입지 못하였으나 그나마 느끼는 고통이 짧은, 교수대에서 몸통이 밑으로 떨어져 질식사하는 long drop 방식으로 처형했다. 


일본전범의 우두머리격인 진주만 불법공격과 태평양 전쟁의 총책임자인 제40대 내각 총리대신 육군대장 도죠 히데끼 역시 현직 군인신분 이라 명예롭게 군복을 입고 총살형으로 처형해 줄것을 요청했으나 기각되어 일반죄수복을 입은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천적 이었던 맥아더의 사인이 되어있는 사형집행 명령서 한장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그도 역시, 구시대의 모든 규칙이 무효가 되었음을 깨달았으리라. 


폐허가 된 옛 질서 위에서 맥아더는 또 다른 얼굴, ‘해방자’로 변신했다. 그는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했으며, 그중에서도 토지 개혁은 핵심이었다. 그는 지주가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을 1정보(약 2.45에이커)로 제한하고, 초과분은 정부가 헐값에 강제 매입해 무소유 소작농에게 재분배 하도록 했다. 


단 2년만에 일본 소작농의 약 90%가 자기 땅을 갖게 되었고, 농업 생산력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아사직전 굶주림의 경계에서 허덕이던 서민들과 하층민들 에게 맥아더는 생존의 길을 열어준 ‘구세주’였다.

그는 일본 여성들 에게도 전례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참정권과 재산 상속권을 인정함으로써 수천 년간 이어져온 남존여비의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 하였다.


그가 주도해 제정된 신헌법은 특히 ‘제9조’로 유명하다. 해당 조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한 국제 평화를 진심으로 추구하며, 국가 권력에 의한 전쟁과 무력의 위협 또는 무력 행사를 국제 분쟁 해결 수단으로 영구히 포기한다.”


이 영구 비무장 조항은 일본의 목에 씌워진 무장해제의 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후 일본이 군비 경쟁을 피하고 모든 자원을 경제 발전에 투입할 수 있게 만든 토대이기도 했다. 이는 훗날 일본의 재도약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물론 이 ‘상왕’의 생활은 극도로 사치 스러웠다. 그는 재벌 가문의 호화 관저에 거주하며 미국식으로 개조했고, 침구류까지 모두 미국에서 공수했다. 평범한 일본 시민들이 보리와 밀기울이 섞인 주먹밥을 얻기 위해 줄을 서던 시절, 그의 식탁에는 매일 미국 본토에서 공수된 신선한 스테이크와 채소, 향긋한 커피가 올랐다.


그와 ‘쇼와 시대 제일의 여신’이라 불리던 톱스타 여배우 하라 세츠코와의 염문설도 끊임없이 떠돌았다. 그녀는 자주 맥아더의 관저를 드나들며 각종 공식 행사에 동행했다. 어떤이는 이것이 구귀족들이 정복자에게 바친 ‘선물’이라고 했고, 또 어떤이는 국가를 위한 여배우 스스로의 희생이라고 말했다.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소문들이 맥아더의 어떤 전략적 결정을 흔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가 천황을 전범으로 처형 하지않고 살려준 것은 사회안정을 위해 그 권위를 이용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고, 일부 전범을 사면한 것은 친미 정권을 구축하기 위해서 였으며, 재벌을 해체한 것은 군국주의의 경제적 기반이 부활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가 한 모든일은 철저하게 미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 계산된 선택이었다.


결국 일본을 사실상 통치하던 이 절대 권력자도 한국전쟁을 둘러싸고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의견이 충돌하면서 몰락했다. 그는 전쟁을 만주에 집결하고 있는 중공군을 폭격 함으로써 전쟁을 중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한 통의 전보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바로 그 장면, 수백만 명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배웅하는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그들의 눈물 속에는 평화와 인권, 토지와 빵을 가져다준데 대한 감사가 있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담겨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군국주의에 병들어 있던 일본에 대해 외과 수술과도 같은 대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떠났지만, 일본은 이미 그에 의해 영원히 바뀌어 있었다. 

그는 정복자 해방자 그리고 영웅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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