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칼럼] 블루제이 이야기(3)
1980년대 중반, 지역 한국일보에 대한항공·한진해운 여사무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실렸다. 내 나이 20대 중반을 넘어갈 때였다.
당시 한국에서 대한항공에 취업한다는 것은 많은 젊은 여성들이 꿈꾸던 일이었다. 작은 키에 왜소한 체격이었던 나에게는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직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여사무원을 찾는 시애틀에서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1차 면접과 2차 영문 시험을 거쳐 비교적 쉽게 직장을 얻었다. 처음에는 더 좋은 자리로 옮겨주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50여 명이 넘는 미국인 직원들 사이에서 한국인 네 명 중 한 명인 나만 특별한 기회를 얻는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나는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당시 Equipment Control 부서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던 내가 부동산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실제 부동산 거래를 해본 경험도 없었고, 부동산 중개업이라는 직업 자체도 내게는 생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부동산 회사와 바이어 사이에서 통역을 해줄 기회가 생겼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처음으로 부동산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부동산 중개인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우연은 때로 필연의 시작점이 된다. 그때의 작은 우연 하나가 이후 거의 40년 동안 내가 걸어갈 천직의 길을 열어주었으니 말이다.
1980년대 중반에 부동산 면허를 받는 과정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주정부 면허 시험은 일 년에 두 번 정도 실시되었고, 수백 명이 큰 강당에 모여 감독관의 감시 아래 연필 한 자루로 시험을 치렀다.
계산기도 없이 모든 계산을 직접 해야 했고, 미국의 토지 면적을 Square Feet와 Acre로 계산해야 했다. 부동산 전문 용어 역시 영어가 제2언어인 한인에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언어처럼 느껴졌다.
시험을 치른 뒤에도 합격 발표를 알기까지 두세 달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시험을 보고 그 자리에서 결과를 확인하는 시스템은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다행히 나는 첫 시험에 합격했고, 벨뷰 다운타운에서 당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John L. Scott Inc.의 문을 두드렸다. 부동산 업계에서 아시안이나 한국인 중개인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때였고, 젊고 경험도 없던 나에게 그 회사의 분위기와 매니저의 존재감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면접에서 기지를 발휘해 자신 있게 말했다.
“귀사에서 한 가지를 가르쳐 주시면, 저는 열 가지를 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안에 Top Producer가 되겠습니다.”
“If your company teaches me one thing, I can turn it into ten. And within a few months, I will become a top producer.”
나를 독수리 눈처럼 날카롭게 바라보던 매니저는 그날 바로 책상과 전화기를 배정해주었다. 회사 로고의 세련된 필체가 마음에 들어 선택했던 John L. Scott. 그렇게 나의 부동산 인생이 시작되었다.
입사 불과 3개월 만에 나는 Top Producer 대열에 서게 되었다.
당시는 Google Map도 내비게이션도 없었다. 종이로 된 지도를 펼쳐놓고 집의 위치를 하나하나 표시해가며 손님을 모시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부동산 이야기다.
1980년대 시애틀과 벨뷰의 부동산 시장은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부동산 가격이 빠르게 오르던 시절이었고, 많은 한인들에게 내 집 마련은 아메리칸 드림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당시 한인 부동산 업계의 대선배이신 신호범 박사님을 비롯해 먼저 길을 개척한 분들이 몇 분 있었고, LA 등지에서 옮겨온 몇몇 에이전트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식 사무직 생활에 익숙했던 나에게 실적과 영업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부동산 세계는 무척 낯설고 어려웠다.
사람을 만나고, 나를 알리고, 신뢰를 얻어 계약으로 이어가는 모든 과정이 숫기가 없고 진정한 사회생활에 경험이 없던 나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나를 도와주었던 것일까.
당시 한인 사회에는 집을 구입하려는 수요가 많았고,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나를 찾아주었다. 언론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라고 소개될 정도로 예상보다 빠르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수많은 집을 검색하던 시대도 아니었다. 바이어들이 미리 집을 찾아두고 찾아오기도 했고, 손님이 사무실을 찾아오면 원하는 조건을 듣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 집을 마련하고자 하는 한인들의 열망이 컸던 만큼 거래도 활발했다.
생각해보면 참 오묘한 일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내가 부동산 중개인이 될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길에 들어서 수십 년을 걸어왔다.
부동산은 내게 많은 기회와 성취를 안겨주었고, 내가 가장 보람을 느끼고 또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당시 나의 광고 캐치프레이즈는 “아는 것은 부동산, 잘 아는 곳은 벨뷰와 그 이웃 동네입니다”, “한 번의 선택이 3대를 이어갑니다” 등이었다. 대학 때 배운 마케팅을 떠올리며 광고 문구까지 직접 만들었는데, 보는 이들은 신선하다고 했다.
그러나 부동산 업계에서 보내온 지난 40년의 역사가 부동산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긴 사회생활을 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좋은 인연도 참 많이 만났다. 반면 시기와 경쟁,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까지 겪어야 했다. 그중에는 당시 언론에 크게 보도될 만큼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어떤 일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되돌아보아도 ‘어떻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선의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언제나 최선의 선택은 아니라는 사실도 배웠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뜻밖의 모습을 보기도 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거센 시련이 찾아오기도 했다. 때로는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들 앞에 홀로 서서 싸워야 했던 순간도 있었다.
세월은 나를 힘들게만 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했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힘과 쉽게 흔들리지 않는 인내를 가르쳐주었다. 고진감래의 뜻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그토록 치열했던 세월은 내게 또 하나를 남겨주었다. 바로 이야기다.
때로는 믿기 어려울 만큼 가슴이 서늘해지는 이야기들도 있다. 빛과 그림자가 함께했던 지난날의 장면들을 하나씩 꺼내어 글로 옮기다 보면 앞으로의 ‘블루제이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질 것 같다.
어쩌면 지나온 세월은 나를 힘들게만 한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남겨주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삶의 장면을 보여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은퇴를 이야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되어 나는 지나온 길을 천천히 돌아보려 한다. 한때 언론을 장식하던 사건들도 이제는 충분한 세월의 거리를 두고, 내가 직접 보고 겪었던 사실의 범위 안에서 차분하게 되돌아보고 싶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젊은 날 우연히 맡았던 한 번의 통역. 그 작은 일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고, 결국 평생의 직업이 되었다.
어떤 인연은 처음에는 우연의 얼굴로 찾아온다. 그리고 긴 세월을 함께 걸어본 뒤에야 우리는 그것이 필연이었음을 알게 된다.
나에게 부동산은 바로 그런 인연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