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목 회계사] 679. 과잉생산과 사치 9 - 시애틀한인 회계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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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목 회계사] 679. 과잉생산과 사치 9 - 시애틀한인 회계사칼럼

<지난 호에 이어>

칼럼 671호(과잉생산과 차치 1)부터 8개의 칼럼에서 검토한 바, 마르크스 이후 자본주의 사회는 소득 불평등과 사치를 통하여 과잉생산 문제를 해결하고 번영의 수준을 높여왔다. 


마르크스는 소득의 불평등과 사치를 배격했다. 설사 사치와 불평등이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마르크스에게는 번영보다도 ‘자유’가 더 중요했다. 


마르크스를 유물론자라 하지만, 그의 소망은 물질의 영역을 넘어 자유의 영역에 가 있었다. 그러한 마르크스의 생각은 자본론 제3권 제48장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In fact, the realm of freedom actually begins only where labour which is determined by necessity and mundane considerations ceases; thus in the very nature of things it lies beyond the sphere of actual material production. Just as the savage must wrestle with Nature to satisfy his wants, to maintain and reproduce life, so must civilised man, and he must do so in all social formations and under all possible modes of production. 

With his development this realm of physical necessity expands as a result of his wants (1); but, at the same time, the forces of production which satisfy these wants also increase. Freedom in this field can only consist in socialised man, the associated producers, rationally regulating their interchange with Nature, bringing it under their common control, instead of being ruled by it as by the blind forces of Nature; and achieving this with the least expenditure of energy and under conditions most favourable to, and worthy of, their human nature. But it nonetheless still remains a realm of necessity. Beyond it begins that development of human energy which is an end in itself (2), the true realm of freedom, which, however, can blossom forth only with this realm of necessity as its basis. The shortening of the working-day is its basic prerequisite. 


사실 자유의 영역은 필요와 일상의 고려에 의하여 결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만물의 본질이 그러하므로, 자유는 현실의 물질적 생산을 넘어선 영역에 있다. 


원시인이 필요를 충족하고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하기 위해 자연과 씨름해야 했듯이,  문명인도 그렇게 해야 하고, 문명인은 그 사회의 형태를 막론하고 가능한 모든 생산 양식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개발의 진척에 따라 욕구는 증가하고, 그 결과 물리적 필요의 영역은 확장된다. (1) 그러나, 이러한 욕구를 충족하는 생산력도 그와 동시에 증가한다. 생산이라는 분야에서 관찰되는 자유는 공동체화된 사람들, 즉 공동 생산자들에게만 존재한다. 


그들은 자연의 맹목적인 힘의 지배를 받듯이 자연과의 상호작용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자연과의 상호 작용을 공동으로 통제한다. 


그들은 또 최소의 에너지 소비로써, 그들의 인성에 가장 유리하고 그들의 인성에 비추어 가장 가치 있는 조건 하에서, 그것을 성취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아직 필요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그것을 지나야만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 에너지의 개발(2)이 시작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 영역이며, 그 영역은 이 필요의 영역을 기초로 하여서만 피어날 수 있다. 


노동시간의 축소는 기초적인 전제조건이다.”

길고 다소 지루한 위 인용문은 종종 마르크스의 자유론을 들여다보기 위해 언급되는 부분이다. 


줄친 부분은 모두 난해하나, 번호를 붙인 두 부분 말고는 필자가 번역한 대로 (오역이 있을지라도) 대충 이해해도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전체의 맥락은 인용문의 끝에 있는 “노동시간의 축소”라는 말에서 분명해진다. 마르크스의 지상목표는 노동시간의 단축이며, 마르크스에게 자유란 것은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번호를 붙인 두 부분으로 인하여, 마르크스의 이러한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줄친 (1)에서 “필요성의 영역이 확장된다” 하는 말은, 세월에 따라 필요한 품목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없었으나 지금은 필요하게 된 것들 중에는, 처음에는 사치품이었던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새로운 질병에 대응하여 개발된 새로운 약품은 사치품이라 하기 곤란하다. 험악해지는 사회현상에 대비하여 개발된 가정의 경비 시스템도 사치품이라 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인간 또는 인간 아닌 것으로부터의 도전에 응한 품목일 뿐, 줄친 (1) 의 “개발의 진척에 따라 생겨난 품목”은 아니다. 


줄친 (1)의 문맥에서 당시 마르크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전거, 전화기 등 제2 산업혁명 초창기 발명품들이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자전거, 전화기 등은 모두 대중화 이후의 한 순간만을 관찰하면 일용품이었지만, 발명되던 시점에서는 모두 사치품이었다. 자본론 제3권이 발간되던 1890년대에 일용품인 자전거를 사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는 것은, 1860년대에 사치품인 자전거가 발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새로 생겨나는 사치품을 배격하면, 미래에 “개발의 진척에 따라” 추가되어 있을 일용품은 없다. 


줄친 (1)은 현실에 맞추기 위해 엉거주춤 삽입된 것이며, 사치를 배격하는 인용문 전체의 문맥과는 어긋난다. 줄친 (1)이 현실에 맞다는 것은, 저 인용문 전체의 사치품 배격 논리가 현실과 어긋난다는 뜻이다. 다음 주에는 줄친 (2)를 검토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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