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열모칼럼] "음력설(舊正)의 由來" -시애틀한인문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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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열모칼럼] "음력설(舊正)의 由來" -시애틀한인문학칼럼

오는 2월 12일(금)은 음력으로 1월 1일로서 음력설(舊正)이다. 우리나라는 5천년 동안 일력(日曆)을 쓰지 않고 월력(月曆)을 계속해서 써왔기 때문에 음력설을 꾸준히 쇠었다. 


그러다가 구한말(舊韓末)인 1894년에 단행한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계기로 이재까지의 월력을 폐지하고 일력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이에 따라 이제까지 전통적 명절로 쇠던 음력설 대신에 양력설을 쇠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양력설을 일본의 명절로 여기고,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음력설을 꾸준히 지켜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일제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양력설을 쇠게 하고, 음력설을 쇠지 못하도록 강경책을 썼는데도 오히려 큰 명절로 쇠던 것이다. 

 

이에 맞서 일제는 교묘한 방법으로 음력설을 쇠지 못하게 했다. 


떡 방앗간을 폐쇄하고, 한복을 입고 세배 다니는 사람에게 검은 색 물감의 물총을 쏘아 얼룩지게 하는 등 잔인한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5년 광복 후에도 정부는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낙후된 인습을 타파한다는 뜻에서 음력과세를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력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 정부는 1981년에 “음력설과 양력설”이라는 구체적인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의해 음력설을 굳이 공휴일로 정하지 않고서도 고유 풍습을 전승한다는 관점에서 세배도 하고, 민속 놀이도하며, 저녁에는 제사를 올려도 무방하다며 단속을 어느 정도 완화했다.

      

이에 따라 음력설이 더욱 큰 명절로 이어지자 정부는 1985년에 음력설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1989년에 드디어 음력설을 “설”이라고 공식적으로 명명하는 동시 3일 동안을 국정 공휴일로 공포해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의 “설”은 이러한 우여곡절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설”에 대한 의미가 더욱 새로워지고, 특히 우리 늙은 세대에게는 아득한 어린 시절의 설날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아득한 옛날 가난하게 살던 시절에 설날은 추석과 더불어 우리 민족에게는 가장 큰 명절이었다.

  

이날에는 새 옷에 새 신발을 갈아 신고 평소에 좀처럼 먹지 못하던 떡이나 참기름에 무친 향기로운 반찬을 이날에는 배불리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서는 또래들과 함께 연날리기도 하고, 팽이도 치고 제기도 차며 즐겁게 뛰놀았다.

    

춥고 배고프던 그 시절의 설날에는 이렇게 아기자기한 정취를 느꼈는데 잘 먹고 잘 사는 오늘의 설날에는 이러한 아름다운 정서를 느껴 보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다. 


따라서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은 물질적으로는 비록 풍요롭고 해복하게 잘 사는 것 같지만 정서적으로는 오히려 가난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가난한 사람만의 축복”이며 조물주의 위대하고도 공평한 섭리라고 여겨진다. 

  

음력설을 맞이하면서 아득한 어린 시절의 아기자기한 추억을 이렇게 오늘의 무미건조한 현실과 비교해 보면 일종의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더욱이 요즘 코로나 소동 때문에 세배는 고사하고 모임도 없으니 더욱 쓸쓸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지난날 미국에서 살 때  Federal Way 한국학교 어린이들이 설날을 맞이하면 선생님들에게 세배 드리고서는 함께 제기차기도 하고, 팽이도 돌리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를 체험하던 그 현장이 문뜩 떠올랐다. 


이 한국학교는 음력설뿐만 아니라 추석에도 송편을 직접 만들면서 아름다운 정서교육에 힘쓰고 있었다. Tacoma에 위치한 “아태문화원”에서는 해마디 음력설에는 성대한 문화행사를 치르던 현장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음력설을 맞이하면서 이와 같이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보니 그 시절이 모질게도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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