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국칼럼] “진정한 의사, 장기려” - 시애틀한인커뮤니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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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칼럼] “진정한 의사, 장기려” - 시애틀한인커뮤니티칼럼

가난한 한 시골 농부가 병으로 입원했다가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가야 하는데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해 치료해준 장 박사를 찾아왔다.


“원장님, 원무과에서 부족한 입원비를 훗날 갚겠다고 통사정을 해도 안 받아주네요. 모내기 철이라 속히 내려가야 하는데 사정 좀 봐주십시오.” 생각에 잠겼던 장 박사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밤 병원 뒷문을 열어놓을 테니 살짝 도망치시오.” 그날 밤, 농부 부부는 살금살금 뒷문 쪽으로 걸어왔다. “여기요, 여기” 어둠 속에서 원장님은 농부의 거친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자, 여기 얼마 안 되지만 차비로 쓰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살길 바라오.” 다음날 아침 환자가 사라졌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서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달려왔다.


“원장님, 106호 환자가 간밤에 사라졌습니다.” “사실은 내가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주었소. 다 나은 환자를 병원에서 그냥 붙들고 있는 것은 온당하지 않아요. 


이 과장도 알다시피 지금은 바쁜 농사철이오.” 병원비를 낼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딱한 환자가 야밤을 틈타서 도망하도록 병원 뒷문을 열어놓았다는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우리네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장 박사는 너무나 선량하고 마음씨가 곱다고 붙여진 별명, “바보 의사” 장기려. 그가 행한 바보 이야기를 일일이 적자면 책으로 몇 권이 될 것이라고 한다. 장 박사는 평생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인술을 배풀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 의사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 병원비가 없어 전전긍긍하는 환자들을 대신해 병원비를 내주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지 손에 쥐는 월급은 늘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의사들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무의촌을 찾아 환자들을 돌보느라 자신의 건강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 장 박사가 나이 들어 은퇴할 때 변변한 집 한 채가 없어서 병원 옥탑방에서 살았다. 


그의 바보 의사 행진은 온정과 사랑이 메말라버린 우리에게 따끔한 교훈을 준다. 그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의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서 의사 얼굴 한 번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1928년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 의대)에 입학하여 4년 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에 의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해 새문안교회에서 결혼하여 3남3녀를 두었다. 장기려는 젊은 날 불쌍하고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40년 평양으로 올라가 선교병원인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인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동란을 만나 급히 남으로 철수하는 한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둘째 아들 하나만 데리고 야전병원 앰블런스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에 정착한 그는 서울대 의대 외과학 교수를 거쳐 1976년 부산 아동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장 박사는 1976년까지 25년 동안 복음병원 원장으로 봉직했다. 장 박사가 의학계에 남긴 업적은 한국 최초의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간 부문의 한국 최고 의사로서 1961년 학술상을 받았다. 1974년에는 한국 간 연구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장 박사는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의 선구자이기도 하며 1968년 영세민들에게 의료복지 혜택을 주기위해 한국 최초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발족시키는 한편 이 조합이 직영하는 청십자병원을 설립했다. 


장 박사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막사이사이상을 1979년에 받았다. 장 박사는 남북 분단의 희생자였다. 


그는 한국동란 때 북에 남겨둔 아내와 다섯 자녀를 영영 만나보지 못하고 독신으로 살았다. 


장 박사는 1995년 12월25일 성턴절 새벽에 85세를 일기로 서울 백병원에서 지병인 당뇨병으로 생을 마쳤다. 그분의 유해는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모셨는데 그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의학박사 장기려.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선량한 부산시민, 의사, 크리스천.”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하늘나라로 갔다. 평생 몸소 가난을 실천하는 그의 삶의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낸 증인이었다. 


“늙어서 별로 가진 것 없는 것은 다소 기쁨이기는 하지만 죽었을 때 물레 하나만 남긴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의사 일은 신이 자기에게 내리신 명령이다.”라고 그는 늘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고 멋지고 인간미가 풍기는 의사 장기려 박사를 우리 모두는 사랑하고 존경한다. (김준수 지음, “그래도 감사합니다” 중에서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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