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열모칼럼] "3.1運動의 역사적 의미" -시애틀한인문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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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열모칼럼] "3.1運動의 역사적 의미" -시애틀한인문학칼럼

금년의 3월 1일은 3.1운동 102주년이다. 3.1운동은 우리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탈 당한지 꼭 10년 뒤인 1919년의 3월 1일에 일어났다.

    

이날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 모인 인파가 “대한독립 만세”로 시작된 3.1운동은 전국 각지에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이렇게 외친 3.1운동의 만세 소리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울분을 세계만방에 토로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의연한 기개를 외부 세계에 유감없이 알린 것이다.

   

이렇게 일어난 3.1운동이 계기가 되어 상해 임시정부가 탄생 되었고, 8.15광복 후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으니 3.1운동은 우리 나라의 뿌리라는 사실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3.1운동이 발생한 동기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직후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民族)  자결권(自決權)”에서 싹텄다.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권은 “모든 민족은 어느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한다”는 원칙이기 때문에 당시 일제의 무단정치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소망을 주었다.

   

이에 고무된 당시의 민족 지도자 모두가 뜻을 모아 이번 기회에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결의를 다졌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인 1919년의 1월 21일에 마침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덕수궁에서 승하해 백성들의 슬픔까지 겹쳐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한층 고조되었다.

  

이때 종교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3.1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은밀히 세웠다. 


이 계획에 동참한 민족대표는 천도교에서 손병희와 최린, 기독교 대표로 이승훈, 불교 대표로 한용운 등 33명이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고 서명까지 했다.

  

이들 민족대표 33명은 3월 1일 아침,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태화관에 모여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정오에 자리를 파고다 공원으로 옮겨 운집한 군중 앞에서 독립 선언서를 결연히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일제히 불렀다.

  

이렇게 발단된 3.1운동이 평양, 함흥 원산, 전주, 광주, 대구, 부산 등 대도시로 번지더니 전국의 읍, 면 단위의 농촌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3.1운동은 식민통치에 대한 민족적 울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까지 냉철한 이성으로 폭력 없이 평화적으로 전개했는데 일제는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주동자를 검거해서 고문했다.

    

이렇게 전개된 3.1운동에는 여러 가지 일화도 생겨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도 특히 경기도 화성군의 제암리에서는 일본 헌병들이 시위 군중을 교회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잔인하게 학살한 사실은 잊혀지지 않는다.

  

또한 충청남도 천안의 아오내 장터에서는 17세의 유관순 학생이, 저 북녘땅 함경북도 명천군의 하기면에서는 15세의 동풍신(董豊信) 학생이 앞장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주도한 사실도 특기할 사실이다. 


이 두 여학생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옥중에서 만세를 소리 높이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투사들이 3.1운동 직후인 그해 4월 11일에 중국 상해(上海)에 모여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국호(國號)와 헌법을 제정했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한다”라고 명시했다. 


이 새 헌법에 따라 우리나라는 5000년 동안 내려오던 군주제를 국민 주권의 현대적 국가로 바꾼 것이다. 

 

이리하여 3.1운동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전 세계에 선포했으니 그 영향이 국제사회에서 바로 나타났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할 지경에 이르자 전후처리(戰後處理)를 모색하기 위해 열린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 22일–27일)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 등 연합국 수뇌들은 독립을 갈망하고 있는 조선(朝鮮)을 이번 기회에 독립시킬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3.1운동에서 나타난 한민족의 독립 염원이 국제사회에 널리 얼려졌다는 사실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더욱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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