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열모칼럼] 8.15광복 당시의 아련한 추억

전문가 칼럼

[동열모칼럼] 8.15광복 당시의 아련한 추억

올해도 어느덧 8월에 들어섰다. 8월은 “광복과 건국의 달”이기에 우리 민족에게 8월은 영광의 달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그 당시의 추억이 7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잊혀지지 않고 아련히 떠오른다. 1945년의 8월 15일에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된 것이다. 


일본은 중국대륙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 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역까지 장악하려고 1941년 12월 7일 새벽에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일본은 大東亞戰爭이라고 호칭)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4년 동안이나 이어지다가 1945년 8월에 미국의 원자탄 공격을 받고 드디어 무조건 항복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보도한 일본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의 기사를 간추려 여기에 옮겨본다. 1945년 8월 6일의 아침 8시경에 일본 히로시마(廣島市)에서 다급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거의 날마다 당하는 미군의 B-29 폭격기 공습에 지친 시민들은 이날 아침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겁에 질려 황급이 방공호에 대피했다. 


그런데 이날 아침의 공습은 B-29가 한꺼번에 무리를 지어 오지 않고 두 대가 高空에서 나타나 조용히 날아오다가 시내의 중심부 상공에 이르자 시커먼 물체 하나를 떨어트리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이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온 시가지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B-29가 떨어트린 이 검은 물체가 바로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터트린 원자탄인 것이다. 3일 뒤인 8월 9일에는 나가사끼(長崎)에도 원자탄을 떨어트렸다. 이상이 아사히 신문의 기사이다.  


일본이 이렇게 두 번이나 원자탄 폭격을 받고 빈사 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해 소련(현 러시아)는 일본과 이미 체결한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이 항복하기 6일 전인 8월 9일에 만주에 침공했다.  


만주는 당시 일본이 점유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소련과 체결한 불가침 조약을 믿고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을 태평양 전선으로 빼냈기 때문에 만주는 무방비 상태였으니 소련은 무혈점령한 것이다.  


소련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바로 북조선에 진주했으니 소련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극동에서 막대한 이권을 챙긴 것이다.  


북조선에 진주한 소련군은 스탈린의 은밀한 지령에 따라 주둔군 사령관 스티코프 장군의 공작으로 그해(1945년) 10월 10일에 <북조선 노동당>을 창건하고 4일 뒤인 10월 14일에 평양에서 군중대회를 열고서 33세의 김일성을 영도자로 앞세우고 토지개혁부터 단행했으니 <북조선 고동당>은 <북조선 정부>인 것이다. 


이와 같이 사실상의 정부를 수립하고서도 북한은 남한이 1948년 8월 15일에 정부를 먼저 수립했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해 9월 9일에 뒤따라 수립했다고 주장하니 이는 대외 선전용인 것이다.  


김일성은 정권을 장악하자 북조선의 도시마다 높은 건물 벽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를 나란히 게양하고, 그 초상화에는 각각 <스탈린 대원수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라고 써 붙였다.  


다음 해인 1946년 3월에는 <토지개혁령>을 공포하고,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서 소작인에게 분배하고서 무거운 <현물세>를 부과하고, 독재체제를 강화했다. 

  

이 독재에 반대하면 무조건 반동분자로 낙인 찍고 탄압해 이에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탈출했던 것이다.  


당시 咸鏡南道 北靑郡에 살던 우리 집도 반동분자로 몰려 위기의식을 느끼신 부모님의 결단으로. 나도 1947년의 3월 22일에 집을 떠나 38선을 넘어 1주일만인 28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와보니 이곳 분위기는 북조선과 전혀 달랐다.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의 통제로 모든 일을 착착 집행했는데 남한에서는 우익과 좌익으로 갈라져 소란하기만 했다.  그때 당시 우익은 군중 집회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 운동장)에서 개최하고, 좌익은 남산에 있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신궁(朝鮮神宮) 자리에서 열었다.   


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이 전국 각지에서 대형 사건을 연이어 터뜨려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 대표적 사건이 대구폭동(1946년 10월 1일), 정 판사 위조지폐 사건(1947년 3월), 제주도 4.3사건(1948년 4월 3일), 여순반란사건(1948년 10월 19일)인 것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다행스럽게도 위대한 영도자가 나타나 탁월한 외교 솜씨로 UN의 결의를 얻어 1948년 5월 10일에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 선거를 해 국회를 구성하고, 이 국회에서 공화체제의 정부를 수립해 대한민국이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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