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죽으면 몰래 야산에 묻고 정부지원금 계속 수령했다"
06.08 22:27
"하루종일 농장일 하고, 보상은 쌀밥 한그릇이었다"
"시계 훔쳤다는 누명 쓰고 2박3일간 폭행 당하기도"
"고아들은 국가폭력 피해자"…고아출신 송준영씨 <피해증언>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송준영 씨
[고아권익연대 촬영]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나는 전자 손목시계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2박 3일간 부당하게 폭행당했습니다. 보육원에서 폭력은 일상이었습니다. 50대, 100대는 평범한 수준이고 150대를 맞은 적도 있습니다. 주말과 방학 때는 원장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농사 일을 하고는 그 대가로 쌀밥 한 그릇을 얻어먹었습니다."
"나는 보육원에서 죽은 듯한 한 아이를 봤습니다. 당시 보육원에서는 아이가 죽어도 사망으로 처리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보육원이 정부의 지원금과 후원자의 후원금을 계속 받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서울의 A 보육원 출신 송준영(55) 씨는 지난 5월 17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인터뷰는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는 송 씨의 증언과 관련, "내가 고아원에서 자랐던 시절에 내 옆에서 6살 고아 후배가 죽는 것을 직접 봤다"면서 "하지만 보육원은 조용히 암매장하고 정부와 지자체에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조 대표는 "국가폭력을 당한 고아들에게 국가가 보상과 배상을 해야 한다"면서 "보육원을 비롯한 시설들에 대한 신뢰할만한 전수조사, 범죄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표창장"
송준영 씨는 2025년 2월 뺑소니 차량 운전자 검거에 대한 공로로 양천경찰서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본인 제공]
<송준영 씨 인터뷰 1차 기사 요약>
[삶] "난 4살 때부터 3년간 고아원 여교사한테 성폭행 당했다"(2025년 5월31일 송고)
나는 4살 때인 1974년 놀이터에서 혼자 울고 있었는데, 순경이 파출소로 데려갔다. 그 파출소에서 1∼2시간 정도 있다가 서울시 아동임시보호소를 거쳐 A보육원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랐다.
당시 경찰은 내 부모를 적극적으로 찾아주지 않은 것 같다. 경찰이 보육원에 아이를 넘기면 '수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보육원에 들어간 지 이틀 만에 성폭행당하기 시작했다. 30세 전후의 미혼 여성 보육교사가 자기에게 유사 성행위를 하라고 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폭행당하니 나는 필사적으로 해야 했다. 이런 고통은 3년간 지속됐다.
7살 때는 그 여교사로부터 벗어났으나 곧바로 보육원 형들한테 성폭행당하기 시작했다. 2명의 형이 동시에 나를 성폭행하기도 했다. 처음에 거절했더니 그 형은 나의 머리를 각목으로 내리쳤다. 그때 나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나의 성폭행 피해는 11살 때까지 지속됐다.
나는 원장이나 경찰에 성폭력 피해 사실을 신고하지 못했다. 신고하는 순간 초주검을 당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당시 보육원은 성폭력이든, 일반 폭력이든 누구한테 말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보육 시설이 가장 많은 나라다. 이제는 한국에서 고아 산업, 고아 사업이 중단돼야 한다.
송준영 씨가 자랐던 보육원에서 아이들이 오리 사육하는 방법을 배우는 모습
[조윤환 고아권억연대 대표 제공]
<다음은 송준영 씨 인터뷰 2차 기사 질문-답변>
-- 보육원에서 나온 것은 언제인가.
▲ 14살 때였다. 매를 못 이기고 나왔다.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100대 정도 맞는 것은 견딜 수 있다. 그렇지만 주먹과 발로 무자비하게 맞으면 견디기 어렵다. 내 치아가 지금 정상적이지 않은데, 이건 폭행당했기 때문이다.
-- 100대씩 때린단 말인가.
▲ 50대, 100대 정도는 평범한 수준이다. 나는 150대까지 맞기도 했다. 형 1명이 150대를 때리는 것은 아니다. 여러 형들이 돌아가면서 폭행한다. 그 도구는 쇠 파이프, 야구방망이, 각목 등 다양했다.
-- 보육교사가 폭행하는 일도 있었나.
▲ 주로 선배들이 때리는데, 보육교사가 폭행하기도 한다. 원감(원장 바로 아래 직위)과 교사들은 보육원 내의 이런 폭행을 알고도 묵인했다. 방안에 아이들이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누가 봐도 폭행 현장이다. 그렇지만 원감과 교사들은 문을 열었다가 이걸 보고도 그냥 문 닫고 나갔다.
-- 원감과 교사들은 왜 묵인하나.
▲ 아이들에 대한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폭행에는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 이유가 없었다. 그냥 때렸다. 신발 정리가 안 돼 있다고 때리기도 했는데, 그건 핑계일 뿐이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 구구단을 잘 못 외운다는 이유로 보육원 형한테 많이 맞았다. 당시 고아들은 보육원 큰 식당에 모여서 공부했는데, 그 형이 "이거 읽어봐"라고 하기도 하고, "2 곱하기 8은 뭐야?"라고 묻기도 했다. 제대로 읽지 못하고, 구구단 정답을 맞히지 못하면 나는 보육원 내 놀이터로 끌려 나갔다. 거기서 몽둥이로 맞았다. 맞으면서 졸기도 했을 정도로 폭력은 평범한 일상이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송준영 씨
[고아권익연대 촬영]
-- 구구단을 못 외운다는 이유로 때린다는 것인가.
▲ 나를 때린 그 형도 피해자다, 내가 한글을 못 읽고 구구단을 못 외우면 그 형도 그 위의 형들한테 맞았기 때문이다. 그 형 덕분에 내가 한글을 읽고, 구구단을 외웠으니 지금은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정말로 미워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 그 사람은 누구인가.
▲ 내가 9살 또는 10살 정도였을 때 보육원 내에서 운동회가 열렸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자신의 전자 손목시계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 아이는 보육원생이 아니고, 외부에서 참관하러 왔던 아이였다. 아마도 부모님과 함께 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나를 도둑으로 지목했다. 내가 자기 옆에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보육원 형들과 교사들이 나에게 손목시계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번갈아 가면서 나를 때렸다. 나는 2박 3일간 맞았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다. 모든 사람이 잠자는 밤에도 보육교사 문 앞에서 손든 채 무릎 꿇고 있어야 했다
-- 그래서 어떻게 됐나.
▲ 나는 손목시계를 내놓을 수 없었다. 내가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었다. 나는 10분간 무자비하게 맞고 나서는 거짓말을 했다. 나는 "살려주세요. 저기 톱밥 창고 그 밑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잠깐이라도 매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현장검증 하듯이 나를 앞세우고 톱밥 창고로 갔다. 전체 원생들도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만난 듯이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데 그곳에 손목시계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또 폭행당했다. 이번에도 매질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다른 곳에 뒀다고 또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 또다시 떼 지어 그곳에 몰려갔고, 그곳에도 손목시계가 없으니 또 맞았다.
-- 손목시계는 결국 나오지 않았나.
▲ 그 아이가 손목시계를 찾았다. 자기 집에 있는 책꽂이의 책들 사이에 있었다고 했다. 내가 누명을 쓴 것이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형제복지원 원생 수용시설
강제노역에 동원된 형제복지원 원생들이 생활했던 울산 수용시설의 2014년 모습
[연합뉴스 사진]
-- 보육원에 다른 형태의 폭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 '광대'라는 것이 있었다. 4∼5살의 아이를 들었다가 방바닥에 그냥 놓는 것을 말한다. 고양이는 이런 광대를 당하면 안전하게 착지한다. 사람은 머리가 먼저 떨어져서 충격을 받는다. 나는 팔 뼈에 금이 가서 깁스한 것이 두 번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광대를 당했을 때였다. 다른 한 번은 나한테 날아오는 야구방망이를 팔로 막다가 팔뼈에 금이 간 경우였다. 깁스를 풀었을 때 나는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깁스하고 있을 때는 맞지 않았는데, 이제 또다시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 1주일에 몇 번 정도 폭행당했나.
▲ 1주일에 6일 정도다. 그러니 거의 매일 맞은 셈이다. 왜 맞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 주로 엉덩이를 맞았나.
▲ 형들은 쇠 파이프에 테이프를 감은 뒤 그걸로 허벅지를 때렸다. 그러면 바지에 핏물이 들어서 딱딱하게 굳었다. 엉덩이는 살이 많으니 덜 아프다고 해서 살이 적은 허벅지를 때렸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아파서 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다.
-- 신체검사 과정에서 폭행이 드러날 듯한데.
▲ 그런 신체검사는 없다. 다만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가 방문할 때는 아이들을 불러서 창고에 있는 새 옷을 입혔다. 행사가 끝나면 그 옷을 벗으라고 해서 다시 창고에 집어넣었다.
-- 그 창고는 무슨 창고인가.
▲ 한번은 창고 문이 열려 있어서 몰래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사과, 배 등 먹을 것이 백화점 수준이었다. 그런데 배를 하나 집어 들어 한입 물었더니 푸석푸석했다. 오래돼서 수분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 왜 빨리 아이들한테 주지 않고, 창고에 보관했을까.
▲ 창고 관리하는 분이 있었다. 우리는 '사랑방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분의 집은 고아원 바로 옆이었다. 창고를 자물쇠로 잠가 놓고는 창고에 있는 것을 수시로 자기 집에 가져갔다. 그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수시로 때리기도 했다. 무슨 연유였는지 모르지만, 그분한테 많이 맞았던 기억이 있다.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가 자랐던 보육원(왼쪽)과 원장 사택(오른쪽)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 제공]
-- 언어적 폭력, 정서적 폭력도 있었나.
▲ 당시 보육원에서 언어적 폭력은 폭력이 아니었다. 그냥 기본이었다. 남자한테 "0새끼야", 여자한테 '00년아" 등의 욕을 해댔다. 교사들도 그렇게 욕을 했다. 당시 보육교사는 지금처럼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유치원생도 그런 욕을 들어야 했다.
-- 보육원에서 청결 상태는 어떤가.
▲ 자신의 빨래는 스스로 해야 했다. 빨래하는 시간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알아서 해야 했다. 세탁기는 자주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 없으니 손빨래해야 했다. 목욕탕은 1년에 1번, 신정 때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가면 목욕탕 물이 시커먼 색깔로 변해서 목욕탕 주인이 싫어했다.
-- 국회의원 등이 보육원에 많이 왔나.
▲ 내 기억에는 당시 유명 정치인도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문자들이 돈 봉투를 건네면서 사진을 찍는 것을 나는 수백번은 본 듯하다. 그런데 그렇게 봉투로 오는 돈은 원장의 주머니에 들어간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최근 국회 간담회에서 증언을 하다 눈물을 흘리는 송준영 씨
[배진시 몽테뉴해이입양연대 대표 촬영]
-- 보육원에서 아이들이 죽는 경우도 있나.
▲ 내가 있던 보육원에서 그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보육원 선생님들은 우리들이 큰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아궁이처럼 불 때는 곳의 어떤 통로를 통해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마대자루로 덮여 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 아이가 누구였는지는 지금 잘 생각나지 않는다.
-- 그 아이는 죽은 것인가.
▲ 정확하지 않지만 숨을 안 쉬니 죽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 당시 보육원에서는 아이가 죽어도 여러 사람이 목격하지 않았으면 그냥 야산에 몰래 묻는 일이 있었다. 사망신고도 하지 않았다. 정부가 제공하는 보조금, 외국인이 보내주는 개인 후원금을 계속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개인 후원자가 보육원을 찾아오면 아이가 가출했다고 했다. 아니면 금방까지 있었는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둘러댔다.
-- 아이가 사고로 다치거나 죽어도 보상금은 모두 원장한테 가게 되나,
▲ 이런 일도 있었다. 보육원의 한 아이가 덤프트럭에 치여 숨졌다. 그 보상금 또는 위로금은 원장의 주머니에 들어갔을 것으로 우리는 판단했다. 당시 그건 너무 당연해 보였다.
-- 그 보상금이 왜 원장 개인 주머니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나.
▲ 그 돈이 보육원생들을 위해 쓰였다면 우리가 그런 허접한 옷을 입고, 그렇게 안 좋은 음식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한 동료 보육원생의 배가 볼록 나온 적이 있었다. 왜 그런지 처음에 나는 몰랐다. 알고 보니 영양실조라고 했다. 보육원 측은 이 아이에게만 집중적으로 계란 등을 먹였다. 그랬더니 그 아이의 배가 쑥 들어갔다.
-- 보육원 아이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나,
▲ 내가 자랐던 보육원 원장이 목장도 운영했었다. 우리는 사료용 옥수수밭에 가서 옥수수 베는 일을 했다. 아이들은 그 일을 하고 돌아오면 풀독이 올라 온몸이 빨개졌다. 모내기 철에는 원장 논에 가서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했다. 방학 때나 일요일 등에 그런 농사일을 했다. 그렇게 일하는 날은 쌀밥을 먹는 날이었다. 강제노역에 대한 대가였다.
송준영 씨가 자랐던 보육원의 원생들이 원장 농장에서 모내기 하는 모습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 제공]
-- 고아들은 학교에서도 푸대접받았나.
▲ 허벅지를 많이 맞으면 피도 나고, 아파서 학교 교실의 의자에 앉을 수도 없었다. 그러면 당연히 선생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야 했는데, 모르는 체했다.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다. 거리 퍼레이드를 마치고 60명가량의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 인솔하에 갈비탕집에 갔다. 반 아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만 식당 안으로 못 들어가게 했다. 나는 문밖에서 그냥 서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갈비탕집 아들인 반 아이가 나와서는 나를 안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갈비탕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시계 훔쳤다는 누명 쓰고 2박3일간 폭행 당하기도"
"고아들은 국가폭력 피해자"…고아출신 송준영씨 <피해증언>
편집자 주= 보육원 출신 송준영 씨 인터뷰 기사는 두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이 두 번째 기사입니다. 첫 번째 기사는 5월31일 [삶] "난 4살 때부터 3년간 고아원 여교사한테 성폭행 당했다"라는 제목으로 송고됐습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송준영 씨
[고아권익연대 촬영]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나는 전자 손목시계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2박 3일간 부당하게 폭행당했습니다. 보육원에서 폭력은 일상이었습니다. 50대, 100대는 평범한 수준이고 150대를 맞은 적도 있습니다. 주말과 방학 때는 원장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농사 일을 하고는 그 대가로 쌀밥 한 그릇을 얻어먹었습니다."
"나는 보육원에서 죽은 듯한 한 아이를 봤습니다. 당시 보육원에서는 아이가 죽어도 사망으로 처리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보육원이 정부의 지원금과 후원자의 후원금을 계속 받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서울의 A 보육원 출신 송준영(55) 씨는 지난 5월 17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인터뷰는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는 송 씨의 증언과 관련, "내가 고아원에서 자랐던 시절에 내 옆에서 6살 고아 후배가 죽는 것을 직접 봤다"면서 "하지만 보육원은 조용히 암매장하고 정부와 지자체에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조 대표는 "국가폭력을 당한 고아들에게 국가가 보상과 배상을 해야 한다"면서 "보육원을 비롯한 시설들에 대한 신뢰할만한 전수조사, 범죄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표창장"
송준영 씨는 2025년 2월 뺑소니 차량 운전자 검거에 대한 공로로 양천경찰서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본인 제공]
<송준영 씨 인터뷰 1차 기사 요약>
[삶] "난 4살 때부터 3년간 고아원 여교사한테 성폭행 당했다"(2025년 5월31일 송고)
나는 4살 때인 1974년 놀이터에서 혼자 울고 있었는데, 순경이 파출소로 데려갔다. 그 파출소에서 1∼2시간 정도 있다가 서울시 아동임시보호소를 거쳐 A보육원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랐다.
당시 경찰은 내 부모를 적극적으로 찾아주지 않은 것 같다. 경찰이 보육원에 아이를 넘기면 '수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보육원에 들어간 지 이틀 만에 성폭행당하기 시작했다. 30세 전후의 미혼 여성 보육교사가 자기에게 유사 성행위를 하라고 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폭행당하니 나는 필사적으로 해야 했다. 이런 고통은 3년간 지속됐다.
7살 때는 그 여교사로부터 벗어났으나 곧바로 보육원 형들한테 성폭행당하기 시작했다. 2명의 형이 동시에 나를 성폭행하기도 했다. 처음에 거절했더니 그 형은 나의 머리를 각목으로 내리쳤다. 그때 나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나의 성폭행 피해는 11살 때까지 지속됐다.
나는 원장이나 경찰에 성폭력 피해 사실을 신고하지 못했다. 신고하는 순간 초주검을 당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당시 보육원은 성폭력이든, 일반 폭력이든 누구한테 말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보육 시설이 가장 많은 나라다. 이제는 한국에서 고아 산업, 고아 사업이 중단돼야 한다.
송준영 씨가 자랐던 보육원에서 아이들이 오리 사육하는 방법을 배우는 모습
[조윤환 고아권억연대 대표 제공]
<다음은 송준영 씨 인터뷰 2차 기사 질문-답변>
-- 보육원에서 나온 것은 언제인가.
▲ 14살 때였다. 매를 못 이기고 나왔다.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100대 정도 맞는 것은 견딜 수 있다. 그렇지만 주먹과 발로 무자비하게 맞으면 견디기 어렵다. 내 치아가 지금 정상적이지 않은데, 이건 폭행당했기 때문이다.
-- 100대씩 때린단 말인가.
▲ 50대, 100대 정도는 평범한 수준이다. 나는 150대까지 맞기도 했다. 형 1명이 150대를 때리는 것은 아니다. 여러 형들이 돌아가면서 폭행한다. 그 도구는 쇠 파이프, 야구방망이, 각목 등 다양했다.
-- 보육교사가 폭행하는 일도 있었나.
▲ 주로 선배들이 때리는데, 보육교사가 폭행하기도 한다. 원감(원장 바로 아래 직위)과 교사들은 보육원 내의 이런 폭행을 알고도 묵인했다. 방안에 아이들이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누가 봐도 폭행 현장이다. 그렇지만 원감과 교사들은 문을 열었다가 이걸 보고도 그냥 문 닫고 나갔다.
-- 원감과 교사들은 왜 묵인하나.
▲ 아이들에 대한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폭행에는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 이유가 없었다. 그냥 때렸다. 신발 정리가 안 돼 있다고 때리기도 했는데, 그건 핑계일 뿐이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 구구단을 잘 못 외운다는 이유로 보육원 형한테 많이 맞았다. 당시 고아들은 보육원 큰 식당에 모여서 공부했는데, 그 형이 "이거 읽어봐"라고 하기도 하고, "2 곱하기 8은 뭐야?"라고 묻기도 했다. 제대로 읽지 못하고, 구구단 정답을 맞히지 못하면 나는 보육원 내 놀이터로 끌려 나갔다. 거기서 몽둥이로 맞았다. 맞으면서 졸기도 했을 정도로 폭력은 평범한 일상이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송준영 씨
[고아권익연대 촬영]
-- 구구단을 못 외운다는 이유로 때린다는 것인가.
▲ 나를 때린 그 형도 피해자다, 내가 한글을 못 읽고 구구단을 못 외우면 그 형도 그 위의 형들한테 맞았기 때문이다. 그 형 덕분에 내가 한글을 읽고, 구구단을 외웠으니 지금은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정말로 미워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 그 사람은 누구인가.
▲ 내가 9살 또는 10살 정도였을 때 보육원 내에서 운동회가 열렸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자신의 전자 손목시계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 아이는 보육원생이 아니고, 외부에서 참관하러 왔던 아이였다. 아마도 부모님과 함께 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나를 도둑으로 지목했다. 내가 자기 옆에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보육원 형들과 교사들이 나에게 손목시계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번갈아 가면서 나를 때렸다. 나는 2박 3일간 맞았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다. 모든 사람이 잠자는 밤에도 보육교사 문 앞에서 손든 채 무릎 꿇고 있어야 했다
-- 그래서 어떻게 됐나.
▲ 나는 손목시계를 내놓을 수 없었다. 내가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었다. 나는 10분간 무자비하게 맞고 나서는 거짓말을 했다. 나는 "살려주세요. 저기 톱밥 창고 그 밑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잠깐이라도 매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현장검증 하듯이 나를 앞세우고 톱밥 창고로 갔다. 전체 원생들도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만난 듯이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데 그곳에 손목시계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또 폭행당했다. 이번에도 매질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다른 곳에 뒀다고 또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 또다시 떼 지어 그곳에 몰려갔고, 그곳에도 손목시계가 없으니 또 맞았다.
-- 손목시계는 결국 나오지 않았나.
▲ 그 아이가 손목시계를 찾았다. 자기 집에 있는 책꽂이의 책들 사이에 있었다고 했다. 내가 누명을 쓴 것이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형제복지원 원생 수용시설
강제노역에 동원된 형제복지원 원생들이 생활했던 울산 수용시설의 2014년 모습
[연합뉴스 사진]
-- 보육원에 다른 형태의 폭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 '광대'라는 것이 있었다. 4∼5살의 아이를 들었다가 방바닥에 그냥 놓는 것을 말한다. 고양이는 이런 광대를 당하면 안전하게 착지한다. 사람은 머리가 먼저 떨어져서 충격을 받는다. 나는 팔 뼈에 금이 가서 깁스한 것이 두 번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광대를 당했을 때였다. 다른 한 번은 나한테 날아오는 야구방망이를 팔로 막다가 팔뼈에 금이 간 경우였다. 깁스를 풀었을 때 나는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깁스하고 있을 때는 맞지 않았는데, 이제 또다시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 1주일에 몇 번 정도 폭행당했나.
▲ 1주일에 6일 정도다. 그러니 거의 매일 맞은 셈이다. 왜 맞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 주로 엉덩이를 맞았나.
▲ 형들은 쇠 파이프에 테이프를 감은 뒤 그걸로 허벅지를 때렸다. 그러면 바지에 핏물이 들어서 딱딱하게 굳었다. 엉덩이는 살이 많으니 덜 아프다고 해서 살이 적은 허벅지를 때렸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아파서 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다.
-- 신체검사 과정에서 폭행이 드러날 듯한데.
▲ 그런 신체검사는 없다. 다만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가 방문할 때는 아이들을 불러서 창고에 있는 새 옷을 입혔다. 행사가 끝나면 그 옷을 벗으라고 해서 다시 창고에 집어넣었다.
-- 그 창고는 무슨 창고인가.
▲ 한번은 창고 문이 열려 있어서 몰래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사과, 배 등 먹을 것이 백화점 수준이었다. 그런데 배를 하나 집어 들어 한입 물었더니 푸석푸석했다. 오래돼서 수분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 왜 빨리 아이들한테 주지 않고, 창고에 보관했을까.
▲ 창고 관리하는 분이 있었다. 우리는 '사랑방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분의 집은 고아원 바로 옆이었다. 창고를 자물쇠로 잠가 놓고는 창고에 있는 것을 수시로 자기 집에 가져갔다. 그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수시로 때리기도 했다. 무슨 연유였는지 모르지만, 그분한테 많이 맞았던 기억이 있다.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가 자랐던 보육원(왼쪽)과 원장 사택(오른쪽)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 제공]
-- 언어적 폭력, 정서적 폭력도 있었나.
▲ 당시 보육원에서 언어적 폭력은 폭력이 아니었다. 그냥 기본이었다. 남자한테 "0새끼야", 여자한테 '00년아" 등의 욕을 해댔다. 교사들도 그렇게 욕을 했다. 당시 보육교사는 지금처럼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유치원생도 그런 욕을 들어야 했다.
-- 보육원에서 청결 상태는 어떤가.
▲ 자신의 빨래는 스스로 해야 했다. 빨래하는 시간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알아서 해야 했다. 세탁기는 자주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 없으니 손빨래해야 했다. 목욕탕은 1년에 1번, 신정 때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가면 목욕탕 물이 시커먼 색깔로 변해서 목욕탕 주인이 싫어했다.
-- 국회의원 등이 보육원에 많이 왔나.
▲ 내 기억에는 당시 유명 정치인도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문자들이 돈 봉투를 건네면서 사진을 찍는 것을 나는 수백번은 본 듯하다. 그런데 그렇게 봉투로 오는 돈은 원장의 주머니에 들어간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최근 국회 간담회에서 증언을 하다 눈물을 흘리는 송준영 씨
[배진시 몽테뉴해이입양연대 대표 촬영]
-- 보육원에서 아이들이 죽는 경우도 있나.
▲ 내가 있던 보육원에서 그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보육원 선생님들은 우리들이 큰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아궁이처럼 불 때는 곳의 어떤 통로를 통해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마대자루로 덮여 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 아이가 누구였는지는 지금 잘 생각나지 않는다.
-- 그 아이는 죽은 것인가.
▲ 정확하지 않지만 숨을 안 쉬니 죽은 상태였을 것이다. 그 당시 보육원에서는 아이가 죽어도 여러 사람이 목격하지 않았으면 그냥 야산에 몰래 묻는 일이 있었다. 사망신고도 하지 않았다. 정부가 제공하는 보조금, 외국인이 보내주는 개인 후원금을 계속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개인 후원자가 보육원을 찾아오면 아이가 가출했다고 했다. 아니면 금방까지 있었는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둘러댔다.
-- 아이가 사고로 다치거나 죽어도 보상금은 모두 원장한테 가게 되나,
▲ 이런 일도 있었다. 보육원의 한 아이가 덤프트럭에 치여 숨졌다. 그 보상금 또는 위로금은 원장의 주머니에 들어갔을 것으로 우리는 판단했다. 당시 그건 너무 당연해 보였다.
-- 그 보상금이 왜 원장 개인 주머니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나.
▲ 그 돈이 보육원생들을 위해 쓰였다면 우리가 그런 허접한 옷을 입고, 그렇게 안 좋은 음식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한 동료 보육원생의 배가 볼록 나온 적이 있었다. 왜 그런지 처음에 나는 몰랐다. 알고 보니 영양실조라고 했다. 보육원 측은 이 아이에게만 집중적으로 계란 등을 먹였다. 그랬더니 그 아이의 배가 쑥 들어갔다.
-- 보육원 아이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나,
▲ 내가 자랐던 보육원 원장이 목장도 운영했었다. 우리는 사료용 옥수수밭에 가서 옥수수 베는 일을 했다. 아이들은 그 일을 하고 돌아오면 풀독이 올라 온몸이 빨개졌다. 모내기 철에는 원장 논에 가서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했다. 방학 때나 일요일 등에 그런 농사일을 했다. 그렇게 일하는 날은 쌀밥을 먹는 날이었다. 강제노역에 대한 대가였다.
송준영 씨가 자랐던 보육원의 원생들이 원장 농장에서 모내기 하는 모습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 제공]
-- 고아들은 학교에서도 푸대접받았나.
▲ 허벅지를 많이 맞으면 피도 나고, 아파서 학교 교실의 의자에 앉을 수도 없었다. 그러면 당연히 선생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야 했는데, 모르는 체했다.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다. 거리 퍼레이드를 마치고 60명가량의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 인솔하에 갈비탕집에 갔다. 반 아이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만 식당 안으로 못 들어가게 했다. 나는 문밖에서 그냥 서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갈비탕집 아들인 반 아이가 나와서는 나를 안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갈비탕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