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인생의 끝자락에서
저자 소개 (개략)
◇ 청주 출생 (1934)
◇ 한국외국어대 졸업
◇ <한국수필> 등단 (1998)
◇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외교관 생활 (1961년부터 30여 년간). 외교안보연구원
명예 교수 역임
◇ 제9회 해외한국수필문학상 수상 (2012)
◇ 수필집 『소렌토 아리랑』, 『시애틀의 낮달』
◇ 학술서 『 外交文書作成法』, 『英語書翰文作成法』,
『영문편지 쓰는 법』
◇ 현재 워싱턴주 뷰리엔 거주
크리스마스 무렵에 페더럴웨이 노인정에 근무하는 여직원한테서 『내가 살아온 평생의 길』이라는 회고록을 빌려 읽었다. 작고한 이영수(李永壽) 원로 전직 공직자가 2014년 5월에 시애틀에서 발간하였다. 흥미가 있기에 소개한다.
책 표지에 안경과 회중시계와 챙이 없는 흑색 모자를 쓴 장로 사진이 실려 있다. 노인정에서 이영수 님을 만났을 때에는 회고록을 쓰고 있는 줄을 몰랐다.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는 내 나이 90여 세에 이르도록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랑할 만한 공적 없이 헛되게 보내온 것을 후회한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미움받지 않도록 노력해 왔을 뿐이다.”
이영수 님은 일제 때인 1918년 7월 21일 강원도 원주군 문막면 건등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왕조 네 번째의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의 후손이다. 일제는 내선 일체(內鮮一體)라는 국책을 정하고 한국인의 성명을 일본식 씨명으로 바꾸게 했다. 문막면의 전주 이씨들은 성명을 송산(松山-마쓰야마)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영수 님은 1939년 3월에 춘천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원주군 농회에 취직해서 농회 기수로 임명되었는데, 월 초봉은 32원이었다. 춘천 감리교회에서 친지의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1964년 5월 삼척군 농촌지도소장으로 발령받은 뒤부터 강원도 여러 군의 농촌지도소장을 역임했으며 통일벼 개발과 보급에 이바지한 공로로 진흥청장의 표창장을 받았다. 1979년에 나이 60세로 37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을 선전 포고도 없이 급습했다. 조선에 대한 식민 정책인즉, “지원병 제도가 의무 징병제로 바뀌어 30~40세 이상은 무조건 노무자 징용 대상자가 되어 군수 공장과 탄광 노무자로 나갔고 미혼 여성은 일선 위안부로 강제 징집되었다. 농산물 공출, 금속품 수집, 심지어 소나무의 진액까지 채취하여 공출하게 했다.”
이영수 님이 밝힌 일제의 식민 정책과 만행은, 어린 시절 내가 충북 청주읍 북쪽 자락의 수름재 동네에서 목격한 일제 관헌의 언동 및 만행과 똑같아서 놀랐다. 이영수 님이 회고록을 통해 일제의 농산물 착취와 노무자 징용과 미혼 여성 강제 징집 들을 일러 주니, 역사 공부에 도움이 된다.
2015년 9월 12일 토요일은 우리 부부가 마을을 나와 뒤쪽의 사우스 1번가에서 북행 버스를 탔다. 동포 작가가 하는 강의를 듣기 위해 워싱턴대학교를 찾았다. 동포 문인의 강의를 듣는 것은 2009년 4월 9일에 우리가 시애틀 남쪽의 밀러 크리크 마을(Village at Miller Creek)로 이민해 온 지 6년여 만이다.
워싱턴대학교 동아시아 도서관 건물에 도착하니, 해가 서쪽 시내 위로 기울었다. 이매자(Maija Rhee Devine)라는 작가가 강의실 연단에 서서 우리말로 한인 유학생과 동포들에게 『하늘의 목소리(The Voices of Heaven)』라는 자전적 소설을 소개했다. 영어로 15년에 걸쳐 썼다고 한다. 작가는 서울의 서강대학교에서 B.A.를, 세인트루이스대학교에서 M.A. 학위를 받았다.
저서의 제목은 양어머니의 이름인 ‛소리 음(音)자 하늘 천(天)자’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소설의 내용인즉 한국전쟁 때에 한 여자아이가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다른 집에 양녀로 들어가 자랐다. 남자아이만을 좋아하는 유교 사회의 풍습 아래에서 사랑과 갈등과 아픔을 겪으며 사회 참여에 눈떠 갔다.
동포 작가는 1943년에 변호사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쌍둥이 중 여자로 태어나자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애가 없는 어느 트럭 운전사의 집안에 입양되었다. 그 후 양아버지도 작은엄마를 얻어 아들을 낳았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남동생은 장가갈 때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이매자 님은 이런 인생 유전을 소재로 자서전을 썼는데, 편집자가 읽고는 소설로 쓰라고 권유해서 자전적 소설을 썼다고 한다. 소설에 보면, 미국의 저명한 출판 비평 잡지인 커커스 리뷰즈(Kirkus Reviews)는 이매자의 소설에 대해 “놓치지 말아야 할 복잡하면서도 독특하게 한국적인 러브 스토리(…A complex, uniquely Korean love story that shouldn’t be missed.)”라고 호평했다.
일요일은 창밖에 가을비가 내렸다. 나는 서재에 들어앉아 동포의 소설을 읽었다. 책 표지에 실린 옷고름이 달린 한복 차림의 소녀 모습도 보고 소설 첫째 쪽의 “나를 양녀로 삼고 길러준 사랑하는 부모를 추억하며(In memory of my parents, who adopted me and gave me life)”라는 글도 읽으니, 작가는 효성이 지극한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지금은 일본군을 소재로 ‛위안부의 일기 (Journals of Comfort of Women)’라는 소설을 쓰고 있다니, 나는 대작이 탄생하기를 기원한다.
그 후 나는 이매자 님으로부터 엽서를 받았는데, 글의 내용은 이렇다. “이경구 저자님/외교관님, 저의 시집 한 권과 제가 만든 거북선 책꽂이를 보냅니다. 보내주신 2권의 자전적 수필집 아주 잘 읽고 노트도 적어가면서 여러 가지 구절과 역사적인 자료에 감탄합니다. 이매자 드림.” 2권의 자전적 수필집이란 『소렌토 아리랑』과 『시애틀의 낮달』이다. 두 수필집에는 우리 나라 외교 활동과 수필 작품에 관한 나의 칼럼 몇 편이 들어 있다.
2019년 5월에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해드림출판사에서 『엄마의 이야기』라는 아내의 수필집을 펴냈다. 아내는 수필집 서두에서 “나이가 들고 보니, 밤잠 잃은 밤에는 눈 감고 누워서 나 혼자 켜켜이 묵은 추억을 회상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글로 써 보았다”고 했다.
해드림출판사에서 신인 문학상 당선 작품으로 정한 작품인 「시애틀이 그리운 까닭」에 대한 심사위원의 심사평은 이렇다. “글의 결미(結尾)에서 ‛눈만 뜨면 딸이 사는 시애틀이 눈에 선히 떠오른다. 딸아이가 보스와 함께 병원 카페테리아에 나타나 미소 짓던 모습은 영영 잊히지 않을 영상이다.’라는 문장은 평범한 것 같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아내의 「내가 자주 듣던 “That’s Not Fair!”」라는 작품에 이런 말이 있다.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동안, 어린이들에게서 자주 듣던 말은 ‘그건 공평하지 않아. (That’s not fair.)’라는 말이었다. 어린이들은 공평하지 않은 것을 가장 큰 불만으로 여기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할 때 평화가 깃든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나이가 많고 몸도 허약한 노인이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자기가 쓴 책을 읽고 있으면 만화를 보는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자식들이 옆에 와서 듣는 것 같다고 하였다. 아내가 소파에 앉아 글을 읽는 모습을 보노라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2022년 봄이 되었다. 내 나이가 88세이다.
날씨가 따뜻한 어느 날, 딸이 와서 우리를 승용차에 태우고 페데럴웨이로 향했다. 단골 한국 식당을 찾아가 의자에 앉았다. 식당 모퉁이에 있는 책장을 바라보니, 신문과 잡지들이 들어 있었다. 잡지는 출판사에서 배달한다. 내가 가까이 가니, ‛No. 945 미디어한국’이라는 대형 잡지가 눈에 띄었다. 내용을 훑어보니, 「力動的 새마을 運動 현장」이라는 글이 나온다.
식탁에 앉아 소개란에 보니, 필자는 동열모라는 전직 농촌진흥청 직원이며 1991년 도미하여 페데럴웨이에 거주하면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 농촌지도자 중앙회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농촌지도사업 발전 과정』과 『10대들의 탈출기』들이 있다고 한다.
동열모 선배는 칼럼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은 오늘날 UN이 추진하고 있는 저개발 국가에 대한 원조(UNDP)의 일환으로 東南亞를 위시해 아프리카, 南美에서 하나의 敎本으로 적용되고 있다니 우리는 민족적 긍지를 느끼게 된다.”
동열모 님은 서울에 있는 아들이 서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린다며 몇 년 전에 영주 귀국했다. 페더럴웨이에 살 적에는 일 주일에 한 번씩 ‛동열모의 세상 보기’라는 칼럼을 <미디어한국> 잡지에 기고했기에 우리 부부가 읽었다. 우리는 동열모 칼럼니스트의 열렬한 팬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자취를 기록하여 자손에게 전해 주고 싶어 한다. 인생의 끝자락에 와서 글쓰기로 생애를 마무리하는 벗들을 찾아서 인생 이야기를 나눴더니, 감개무량하다.